1.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약산 김원봉은 경상남도 밀양시 출신으로 19세기의 끝자락인 1898년에 태어났다.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일제를 향한 '폭력투쟁'을 주도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15세에 '표충사'라는 절에서 『손자』, 『오자』와 같은 병서를 읽었다. 1919년 3·1 운동에 영향을 받아 민중의 힘과 더불어 폭력투쟁으로 조국을 해방시키겠다는 결심을 했다. 염인호에 따르면 "의열단은 암살 대상으로서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장성, 대만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밀정, 반민족적 양반·지주 등 이른바 '의열단 7가살'을 정하고 파괴 대상으로는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왜적의 중요 기관 등을 정하였다(2010, p. 239)". 의열단은 부산경찰서·밀양경찰서·종로경찰서·조선총독부 등에 폭탄을 투척했다. 하지만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은 폭력투쟁만으론 한계가 있었다. 김원봉은 개인의 폭력투쟁이 아닌 체계적인 조직을 꾸리고자 1925년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했다. 1926년 졸업한 김원봉에겐 황푸군관학교에서 맺은 중국과의 인맥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후 중일전쟁의 포화 속에서 체계적인 조직인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었다. 수많은 청년들이 독립운동을 위한 군인이 되었다. 문제는 광복 이후 벌어졌다. 일제강점기 고등계 형사였던 '노덕술'이 김원봉에게 굴욕을 주었다. 이는 김원봉이 월북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광복은 이루어졌으나 '공산주의와 자유주의'가 맞붙은 형국은 6·25 전쟁으로 이어졌다.
2.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민족주의 영웅인 김원봉은 지난 2019년 문재인 前 대통령이 현충일에 언급해 논란이 되었다. 6·25 전쟁 때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이 묻힌 현충원에서 '공산주의자'인 김원봉을 언급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공산주의와 자유주의'가 한반도에 남긴 고통은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는 듯하다. 하지만 해방된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민중을 휘두른 '이념'은 현재 우리가 당면한 과제에 비하면 시대착오적이지 않은가. ①핵전쟁, ②기후변화, ③기술 혁신에 따른 파괴와 같은 과제에서 해결책을 구하기보다 오히려 멀어지고 있진 않은가. 맨해튼 프로젝트로 이룬 과학적 성취가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그토록 바랐던 광복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곧장 '공산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이념이 권력의 빈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민중을 위해 싸운 김원봉은 '한반도'의 관점에서 존중받을 가치가 있지 않을까? 상식에 가까운 역사를 뒤로 했을 때 미래를 향한 걸음 역시 왜곡되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정치적인 사람인 김원봉이 어떻게 기억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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